0418

분류없음 2015/04/18 15:16






[자신은 스스로를 위로 할 줄 알아야 한다]


예전엔 경계했던 문장이다. 한 줄만 읽어도 마치 자기연민에 빠진 사고같고, 정신력이 약해서 몸을 사리는 것처럼 보일까봐서.


때로 우리는 '혼자'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공간이나 상황과 상관없이 자신을 고립한다. 그리고 마주하는 고독감과 상실 혹은 어떤 어두운 마음. 그런 때에 누군가의 진심어린 위로의 말도 쉽게 마음에 닿지 않고 빈 공간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아 스스로 고립되기를 자청한다.

그렇다면 이 마음의 문에서 갇힌 나는 누가 꺼내줄까. 또 이 빈 공간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 채우는 것은 내 몫이 아니더라도 어떤 의지가 결국 자신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장면도 그렇다.

상황을 연출하시고 이끄신 것은 하나님이지만 그 걸음을 움직였던 것엔 모세 자신의 의지도 분명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자신에게만 집중했던 것 같다.

나를 알아야 하고, 지금 올라오는 감정에 집중하고 상황에 놓여있는 나를 돌아보고. 그래서 극단적으로 잠수를 타거나 사람과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한다던가.


정말 힘들었던 25살 때. 지금 떠올리면 어둑어둑한 기숙사 방에 나 혼자 음악을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 발을 까딱까딱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철저하게 혼자이고 싶었고 그래서 외로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상황에 무기력했던 내 모습.

그 때의 폭풍우가 지나가고 얻은 것들이 참 많지만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다.

물론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보호하려하고 때론 이기심이 생기거나 어떤 욕구에 대해 본능처럼 반응하지만,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사랑 할 때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사랑이 정말 건강하고 그래서 바람직했고 옳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처럼 하와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런 사랑. 그런 자신의 대한 충실감과 그 충실감이 그대로 하와를 투영하는, 그런 사랑하는 법을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포함해 그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 해서

나 아닌 세상의 것이 주체가 되어 살아지거나, 그 것에 반응해 마치 대리만족하거나 관계에 의지하거나 어떤 물질적인 것이 중심이 되어지거나 등등

여러가지 바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래서 '위로'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스스로에게 "내가 사랑을 하는 게 어렵지만 그 사랑의 형태와 비슷한 위로를 너에게 줄게." 하는 심정으로.


기막힌 타이밍으로 내겐 미세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어떤 생각의 반전같은 것들이랄까.

예를 들면 어떤 상황은 계속 A라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나는 그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실제적인 공간, 혹은 상황, 위치같은 것들.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변화시키지 않고선 바뀌지 않는 것, 그러나 그 것은 내 능력 밖인 것. 결국 A라는 결과를 받아드리게 되면 내 감정을 무시해야하고 타의에 의해서 삶의 의지를 무력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것은 꼭 상채기가 남게 된다. 그래서 오는 상실감도 크지만 사실 그 깊은 곳엔 분노가 잠재되게 된다. 예전엔 이 분노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지 몰랐다.

(우울증도 깊은 내면에 분노가 잠식되어 있는 경우가 80%라고 한다.)

그 것을 막기 위해 어느 정도 자신을 풀어야 된다는 것, 이게 나에게는 너무나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데로 하되 생각이 전화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해석하거나 행동했다. 그 방법이 '텍스트'였다.







살아가면서 지나쳐야하는 어두운 터널.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적으로 앞으로만 가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빛이 없는 터널을 피할 수 없다. 어느 새 깊이 들어온 터널엔 어둠 밖에 없다. 그리고 어둠마저 익숙해지는 때도 온다. 마치 이 터널은 영원히 될 것 처럼. 

그래서 요즘은 대게 집에 오면 녹초가 된다. 새벽을 즐기던 내가 10시만 되면 몸을 지배하는 근육통도 있지만 쓰러져 자고 싶은 생각 밖에 안든다.

사람들을 마주 할 때 생기는 정신적인 무리와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다.

왜냐면

나의 주체적인 마음이나 감정을 누르고 무시한채 상대가 혹은 분위기가 원하는 반응과 행동으로 스스로를 괴롭혔기 때문에.


그리고 스믈스믈 예전처럼 잠수타고 싶고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피하고 싶고, 햇빛에 나가면 낯설고 싫고.


그러나 전처럼 그렇게 하지 않았다. 햇빛이 싫으면 썬글라스를 쓰고 밖으로 나간다.

정 마음이 답답하고 미칠것 같으면 엄마한테 전화해서 펑펑 울고 내 감정을 글로 써서 상대에게 전하고.

전에 하지 못 했던 감정을 조금씩 드러내보는 것이다.


그래서 며칠전에 친구 생일날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는지 카페에서 있는데 사진이 찍힌거다. 그런데 그 사진의 내가 너무 좋았다.

하하.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참아왔던 것을 다시 뒤바꿔 의식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다. 

아직도 너무나 어렵고 쉽지 않지만 조금이나마.

그래서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이런 행동이 내겐 너무나 어려워서.

이렇게 부딪히면 또 배우는 게 있겠지하면서.


그리고 어제 어머니가 보내주신 책 한 권이 도착했다.

금요철야를 피하고 물리치료도 가기 싫어서 방에 박혀있다가 그 것만 읽고 잠들었다.

그리고 성령언니가 선물해줬던 책을 다시 읽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일일까.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이 녹는 것 같다. 누군가 했던 위로의 말들이나 어떤 것보다 명확하고 더 진실되게 더 깊게 내 마음에 박힌다.

상황을 이기고 싶은 의지가 생겨난다. 그리고 다시 글로 정리하고 이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은, 위로를 받고 싶어 상황을 나눈다기보다 어떤 결론을 도출해낸 것을 통해 공감을 받고

그 것이 어떤 과정처럼, 차분한 어조로 소설책을 읽고 마침표를 보고 책을 닫고 창문 밖 풍경을 보면서 잠시 정리하고 고개를 끄덕인다던가.

그런 게 내 위로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진정되고 편한한 상태가 될 것 같다.

동의가 아니더라도 아 그렇구나하는 동조라도 위로가 되겠구나 하는 마음.

나에겐 이런 과정이 위로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감정으로 맞부딪히는 갈등의 힘듬을 경험했기 때문에, 감정이 소비되는 것에 있어 되게 조심스럽게 변했다.

머릿속엔 어떤 객관적인 사실들과 상황에 대한 파악, 그것에 대한 생각들이 너무나 많아서, 감정적이게 되어 그 것을 보일 수 없어지는 걸 싫어하게 됐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자신은 스스로를 위로 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것은

이런 것 같다.


예전에 감정적으로 엄마와 나 사이가 상하는 일이 생기면 

"너를 모르겠다." "왜 그렇게 복잡하니." "너를 대하기 어렵다." 이런 말들이 참 상처였다.

왜 나를 몰라주는 걸까. 

그래서 다시 나를 마구 어필하고 감정을 호소하고 쏟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것은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쏟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거부당하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가끔 엄마가 (나쁜의도로가 아닌)그런 이야기를하면 기분이 좋다.

내가 복잡하고 나를 대하는 게 어렵다는 그 말이 왜 좋을까?

나의 복잡한 것, 생각의 과정, 꼬리를 물고 꼬리를 물었던 그 것들을 다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 자체가 어떤 해석이 될지라도 나의 존재를 인식해준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는 건, 어떻게 보면 삶의 어떤 의지적인 부분을 포기하는 것 같다라는 것이고

자신만 힘들뿐만아니라 어떤 꿈이나 비전, 또는 관계적인 것들 통해서도 영향을 준다.


기호적인 것, 취향같은 것을 알아가는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게 반응하게 되는 나를 입체적으로 보는 것.

누군가의 친구인 '나'도 아니고 어떤 사회적 위치에 속한 '나'가 아니라, 그냥 '나'를 보는 것.


결국

삶을 포기 하지 않는 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알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자기중심적인사고를말하는게아님) 인정하고 받아드리되 그 것이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것.

그리고 나에게 비롯된 어떤 꿈, 생각, 좋아하는 것, 지향할 것들을 정립하는 것.

그 것이 건강하게 풀어지면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 상대를, 세상을 알아가게 되고 거기서 오는 차이로 인해 왜곡하거나 삐뚤어지게 생각하지 않는 것.

마침내 아담이 하와를 사랑한 것처럼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게 될 수 있는 것.



이게 완벽할 수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


물론 불완전한 인간이 그렇게 사고 할 수 있게 되는 바탕엔 그런 내게 주인이 있다는 것이 정립되어야 한다.

'나' 자체가 불완전하다 생각 할 수 있으나 '창조자'가 완벽하다는 것.


'나'의 존재가 특별한 존재에 의해 특별하게지어졌고 특별한 시기에 특별하게 태어나 지금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 명확한 사실을 중심으로 둔다면 가능하다.

왜냐면 특별한 자의 손에 속한 것은 특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걸 읽는다면 이런 판단적인 생각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너는 정체성을 확립하면 되겠다, 하나님 앞에서 정체성이 확실하면 돼, 너의 자아가 더 깨어져야 돼......

......

글쎄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뭐 자아를 내려놓고 뭐 그런게 아니라..

그냥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생각을 풀어내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어떤 틀이나 어떤 무리의 성향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게 아닌, 

일시적이고 한계적인것으로 사회성을 유지하는 게 아닌 혹은 잘못된 관계지속 아니라

내가 나를 바른 방법으로 사랑해나감으로, 이런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또 더 나아가 이런 내가 어떤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인지 차근차근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자연스레 이 터널도 통과하고 빛 속에 나와 걷고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나의 개인적인 성격과 생각들이 담긴, 주관적인 이야기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티스토리 툴바